점심시간,
직원 선생님들이 식사를 하며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김선호가 이번에 나온다느니
아이유가 누구랑 이어질 것 같다는 둥,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익숙한 이름들이라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했지만
정작 나는 맥락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직접 물어보니, 다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었다.
퇴근 후 잠자리에 누웠다가 문득
그 드라마가 궁금해져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미생'을 연출한 김원석 PD였다.
내가 손에 꼽는 드라마였기에
기대감이 확 올라갔다.
결국 참지 못하고 유튜브에서
관련 쇼츠 몇 개를 찾아봤다.
짧은 영상 몇 개만으로도 분위기가 느껴졌고,
많은 이들이 극찬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16부작이라는 긴 호흡,
그리고 '사랑'과 '가족'이라는 주제.
요즘 시대에 이게 통할까 싶었지만,
결국 나는 오랜만에 TV 앞에 앉게 되었다.
무빙 이후로 이렇게 정식으로 드라마를
챙겨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요즘 우리는,
자극적인 콘텐츠의 시대에 살고 있다.
빠른 편집, 강한 리액션,
짧고 강렬한 영상들이 넘쳐난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시청자들을 붙잡기 위해
콘텐츠는 1초라도 빨리 도파민을 자극하려 애쓴다.
도파민은 즉각적인 보상과
쾌락에 반응하는 물질이다.
새로운 정보, 빠른 화면 전환,
짜릿한 전개가 도파민을 자극한다.
반복적으로 도파민에 노출된 뇌는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감정의 문턱은 점점 높아진다.
작은 감정에는 반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폭싹 속았수다'는
이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자극적인 장면을 의도적으로 통제하고,
사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
간접적으로 암시하며 관객의 감정을
천천히 끌어올린다.
'아!' 혹은 '아..." 하고 느껴지는
여운의 타이밍이 절묘하다.
빠르게 휘발되지 않고, 천천히 스며드는 감정.
이 드라마는 도파민이 아니라
엔도르핀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엔도르핀은 따듯함, 공감, 감동 같은
'느린 감정'에서 분비되는 물질이다.
진심 어린 말 한마디, 오래된 가족사진,
누군가의 다정한 눈빛 같은 순간들이
잊고 있던 감정을 건드릴 때,
엔도르핀은 조용하지만 깊이 작용한다.
감정 회로가 오랜만에 자극될 때,
뇌는 그 감정을 더욱 특별하게 인식한다.
이게 바로 '폭싹 속았수다'가 주는
울림의 방식이다.
현실을 중시하는 요즘,
사랑도 계산, 결혼도 전력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낭만은 사라지고, 감정은 실용화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안에서 아주 사소한 따듯함을 포착한다.
거창한 사건 없이도, 그저 말 한마디나
표정 하나로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뇌 안에서는 엔도르핀과 함께
옥시토신, 세로토닌 같은
감정 호르몬이 분비된다.
시청자는 마음이 안정되고
오래도록 남는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시대는 너무 빠르고 너무 자극적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강한 자극에 익숙해지고,
감정을 느끼는 능력은 무뎌진다.
그래서 오히려 잔잔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 깊은 울림을 느끼게 된다.
감동은 결코 강도의 문제가 아니다.
때로는 조용한 이야기 속 한 줄의 진심이
사람의 마음을 더 깊이 울린다.
그리고 그런 진심이야말로
우리 삶과 마음을 진짜로 변화시키는
감정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일상 속에서도 엔도르핀이 분비되는
삶의 방식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거나
책 한 권에 몰입하는 시간.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진심 어린 교감을 나누는
모든 순간들이 엔도르핀을 자극하는
소중한 자극이 된다.
우리는 매일 빠르게 살아가지만,
마음을 잠시 천천히 두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
'폭싹 속았수다' 같은 이야기를 만나고
스스로에게 따뜻한 시간을 선물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힐링일지도 모른다.